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목의 변 (문단 편집) === [[탈문의 변]] === [[경태제]]는 정통제가 귀환할 경우 황제 자리를 내놔야 되나 싶어서 매우 걱정했다. 신하들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설득해서 정통제를 받아들였고 정통제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 경태제의 불안은 타당했다. 명나라의 종친왕들은 의전상 신분만 높고, 연금을 주는 등 예우만 해줄 뿐이지, 실권은 박탈된 채 살았다. 경태제 자신은 예전에 그렇게 살다가 정통제가 사로잡힌 후, 정통제의 생모 성모태황태후[* 경태제의 생모는 즉위 하면서 태황태후에 봉해졌다.]가 나서서 그를 옹립한 상황이었다. 제왕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으며 민심 안정을 위해 정통제의 맏아들 주견심을 황태자로 그대로 놔뒀다. 즉위 과정도 비상상황의 임시조치였기에 권력 기반은 매우 약했다. 그러니 형인 정통제가 복위하면 허락도 없이 즉위한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경태제는 권력 기반이 어느 정도 다져진 후, 형인 정통제의 아들을 황태자에서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몇 년 후 경태제의 태자 주견제가 병사한다. 그런데 경태제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후계자 지명을 거부해서,[* 경태제에게는 주견제 이외의 다른 아들은 없었다. 정확히는 1남 2녀를 두었지만 그 가운데 딸 1명만 성인으로 성장했다. 물론 황제였을 때 나이가 젊었던 만큼, 더 오래 생존하여 계속 재위했다면 다른 아들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다가, 몇 년 뒤 경태제 본인도 병에 걸려서 위독해졌다. 이에 정통제는 자기를 따르는 군사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퇴위, 감금하고 황제에 '''복위'''하였다. 이걸 '''[[탈문의 변]](奪門之變)'''이라고 한다. 그리고 연호를 천순으로 바꿔 '''천순제'''라고 불리었다.[* 사실 이 쿠데타라는 것도 실상은 쿠데타라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매우 어설펐다. 경태제가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정통제가 밤중을 틈타 유폐되어 있던 궁문을 부수고 자금성에 당당히 들어가려 했으나, 궁문 수비병들이 이를 막았고, 이에 정통제는 "짐이 태상황이니라!" 라고 외쳤는데, 그 한 마디에 수비병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고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시즌 2~~ 이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서유정과 조길상이다. 서유정은 토목의 변 당시 남경으로 천도를 주장했다가 우겸의 꾸중에 입을 다문자다. 조길상은 환관이었다. 천순제로 복위한 이후 [[베이징]]을 방어했던 우겸을 사형시키는 등 삽질이 없진 않았다. 어쨌든 예전에 고생한 때문인지, 개판이었던 정통제 시절보다는 조금 괜찮게 정치를 한다. 포로로 잡혔던 기억 때문인지 명나라에 전해지던 몽골 악습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후궁과 궁녀의 순장(殉葬)을 당대에서 끊어버렸다고 한다. 우겸의 사형건은 천순제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맥락과 이유가 있다. 전란이 끝난 후 전시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은 반란을 일으킬 여지가 컸다. 군권을 가지고 승전으로 인기가 높은 자는 딴 생각을 품기 쉬운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사례가 있었기에 중국 역대 왕조는 이들을 극히 경계했다. 쿠데타로 즉위한 자는 권력 유지를 위한 숙청이 필수다. 경태제 옹립 1등 공신인 우겸을 그냥 놔두기는 어려웠으리라. 이를 놔두면 권력 유지가 어렵고 분란의 씨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우겸은 제위나 권력에 야심이 없었다. 베이징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보여준 능력을 감안할 필요가 있었다. 이후 정통제에게 충성을 다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실책이었다는 견해가 다수다. 실제로 천순제도 우겸을 사형시키고 가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청렴결백한 신료였음을 알고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경태제의 즉위 과정을 다시 조사한 후 우겸을 모함한 측근들을 처형했다. 한편 천순제는 자신을 폐위시킨 동생 경태제를 '불효하고 오만불손하고 어질지 않고 정의롭지 않고 도덕을 더럽히고 추문을 드러냈다'며 폄훼했다. 따라서 신과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분개했다며 7년 동안 유폐를 당한 원한을 거의 저주에 가까운 악평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경태제가 사후에 황릉의 장지로 생전에 천수산에 만들어 놓은 수릉을 없애버리고 그를 서산에 안장하게 했다. 그리고 천순제는 그를 폐위시킨 뒤 성려왕이라는 다른 시호를 내렸다. 패륜을 저지르고 사나우며 욕심이 많은 성왕이라는 뜻으로 얼마나 악감정이 심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